시콜다정

제사, 몇 대 조상님까지 지내나요?

mizzero 2022. 2. 11.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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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의 의미와 몇 대조 조상님까지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출처: 가톨릭 평화신문

 

 

 

제사의 의미

제사(祭祀)의 기원은 샤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자연 숭배와 연관이 깊습니다. 신이나 신령, 죽은 사람의 넋 등에게 제물을 봉헌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따라서 고대 종교의 신전 제의, 가톨릭의 미사 등도 넓은 의미로는 제례, 제사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는 주로 조상님을 모시는 제사의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면서 조상의 넋을 기리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후손들이 마음을 다해 예를 올리는 전통문화입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우리나라 제사에 해당하는 조상 추모 의식은 존재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유교적 제례 행위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사는 고려시대 중국의 주자학이 전래되면서 조상 제사 이식도 함께 유입되었습니다. 당시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였으므로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말부터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조선시대에 민간에 널리 장려되었다고 합니다. 유교식으로는 기본적으로 사대봉사(四代奉祀)라고 하여 '제주'의 4대조(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제사가 여러 가지 많은 폐단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는 것은, 죽은 조상신이 후손을 지켜주고 복을 준다는 기복사상(祈福思想)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제사는 조선시대에는 흔히 종손(宗孫)이 집안 제사를 모두 모셨다고 알려졌습니다. 종가에서 남자 형제를 중심으로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고조까지 4대조 제사를 올리는 전통은 언제 생겨났을까요?


'조선시대 제사 승계의 법제와 현실'이라는 정긍식 서울대 법대 교수에 의하면 “종손이 4대를 제사 지내는 풍습은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변혁기에 주자학, 주자가례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16∼17세기 과도기를 거쳐 18세기 이후에야 정착되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유교 사상으로 조선시대는 엄격히 4대조 제사를 지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는 사회 체제가 상당히 달랐다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사도 조선 전기에는 성별이나 형제 순서와 관계없이 돌아가며 담당했으나 후기로 넘어가면서 장자가 전담하는 형태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품 이상의 벼슬은 증조대(3대)까지, 7품 이하는 조부모(2대)까지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고 하며, 평민은 부모만 제사 지내라고 경국대전에 나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장자의 제사 승계는 일제강점기에 확고해졌으며, 광복 이후에도 지속해 종손 중심 제사를 마치 고정불변의 영원한 과거로 착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newsnjo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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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는 몇 대조까지 지내야 하나요? 

제사를 받들어 지내는 봉사(奉祀) 대상은 시대에 따라 바뀌었습니다.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벼슬이 높을수록 더 윗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1품 이상은 3대 봉사, 7품 이상은 2대 봉사, 일반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냈지만,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4대 봉사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1969년 정부가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해 제사 봉사는 2대조까지로 하고, 성묘는 제수를 마련하지 않거나 간소하게 한다고 공표했으나, 지금까지도 고조부까지 4대봉사(四代奉祀)를 하는 집안이 많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무조건적 전통만을 긍정하고 수용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며,  현실 생활과 조화를 이루는 전통을 계승하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2019년 7.2일 제정된 건전가정의례준칙 5장, 제 20조에 기제사의 대상은 제주로부터 2대조까지로 한다.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법령에 이해 2대조까지 제사 봉사를 하면 되겠습니다.

출처: 매일종교신문

 

정리

전통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만 무조건적으로 형식과 과거의 방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4대 봉사를 일반 서민들까지 하게 된 것도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 폐지 철폐로 나타난 허례의 한 면으로 볼 수 있고, 이것이 일제 강점기가 지나면서 더 확고히 변해 마치 고정 불변의 영원한 전통처럼 착각하게 된 면도 없지 않습니다. 

각자의 현실생활과 조화를 이루고, 우리가 평소 기억할 수 있는 조상님을 기리고 추모하는 자리가 되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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